제가 오늘 제 집안 얘기 조금 하려고 합니다.
1951년 01월 13일 날 곽선희 목사님이 고향을 떠납니다
그리고 군에 입대해서 삼년 동안 고생을 하면서 지내는 가운데
제 친구들도 많이 죽었습니다만 살아남고 제대를 하고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를 합니다.
곽선희 목사님은
북한에서 나왔기 때문에, 북한에서 중고등학교를 했으니까
남한에서는 중고등학교를 못 다녔습니다
그래서 검정고시를 해서 대학을 입학을 합니다
이렇게 이렇게 과정을 거쳤습니다만
신학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하려고 할 때 그 당시에 비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.
그게 뭐냐 하면 선교비가 많이 남아 돌아서
목사님들이 유학만 간다고 하면 선교비로 훌 장학금을 줄 때입니다
그렇게 돌아가는데 왜들 못 갔느냐
영어가 안 돼서 못 가는 겁니다
장학금을 주려고 할 때 토플 시험 몇 점 이상을 받아야 된다 하니,
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애썼습니다만
이 영어 토플 시험 때문에
삼년 사년 시험을 보면서 못 가고 그럴 때입니다
그 때 곽선희 목사님이
시험 딱 한번 봤는데 목사님 자신도 놀랐답니다
토플 시험 600점을 맞았답니다
지금도 그 때에 얘기하면 그게 사실이냐고들 합니다
목사님 자신도 놀랐다고 하니까요.
어쩌튼 600점을 맞아 가지고 프린스톤 신학교를 갑니다
굉장히 영광된 것이었습니다
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
그 당시에는 이것은 기적이었으니까요
목사님 개인으로 생각할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.
그 당시에는 왕복 비행기 값을 보내와야
유학을 갈 수 있었을 때 였는데
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람들이 목사님에게 훌 장학금을 주어서 받았답니다
뭐 우리나라에 달라가 없었으니까
그래서 비행기 왕복 표를 보내왔는데,
정말 한국 돈이라는 것을 땡전 한푼 쓴 일이 없었답니다
그대로 알몸으로 가서 이래저래 05년 동안 공부를 했습니다
이게 보통 축복이 아니거든요.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.
그래서 목사님 나름대로는 감사하며
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해서
지금도 프린스톤 신학교에 두 사람!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
아무튼 간에 너무 받은 은혜가 커서
누구에게 보답할 수 없을까 늘 생각하면서 삽니다만
목회하는 도중에 곽선희 목사님 보다 더 나이가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만나면
“곽 목사! 자네 할아버지가 곽치은씨가 맞아!”
“그렇습니다.”
“아! 오늘 만났구만!
내가 목사가 된 것은 자네 할아버지가 장학금을 주어서
내가 목사가 되었어!”
그런 분을 여러분을 만났답니다
그래서 생각합니다
내가 노력하고 내가 잘 난 것이 아니고
우리 할아버지가 뿌려 놓은 것을 내가 거두는 거요
이름 없이 빛없이 그 옛날에 많은 분들에게 이렇게 선한 일을 한 것이
오늘 내게 돌아오는 것이다
조상 덕에 산다
그런 감사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씀합니다.
옛날에는 거지가 많았잖아요?
밥 먹을 때가 되면 정말 착한 사람은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
자꾸 와서 밥 달라고 하니까
착한 아주머니들은 다 주고 나면 자신은 굶어요
그렇게 거지가 많을 때인데
이들을 위해서 일 년에 한 두 차례씩 거지 잔치를 하는 것을 봤답니다
온 면에서 온 거지를 위해서
마당에다 천막을 쳐놓고 일 주일 동안 잔치하는 것을 봤고요.
특별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
곽선희 목사님의 아버지를 불러서 “나 죽거든 거지 잔치 한 번 더 해라.”
그러고 돌아가셨답니다
그렇게 말씀하셨으니
장례식이 장례식 이라기 보다 잔치 집이었답니다
그리고 상여를 쓰지 않고
그 거지들이 할아버지 관을 매고 산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
자! 그런 장면들을 보셨거든요.
그러면서 곽선희 목사님은 생각한답니다
“할아버지가 심어놓은 것을 내가 거두고,
할아버지가 뿌린 거 내가 거두고 있는 게 아닌가!”
그런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